한국을 포함해서 영어를 외국어로 규정하고 교육해온 나라들은 오랫동안 영어의 표준을 미국영어 혹은 영국영어로 삼아 왔다. 그러나 영어가 점점 더 세계 공용어(ELF-English as a lingua franca; EGL-English as a global language; EIL-English as an international language)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진다.
우선 한국에서는 EFL이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EFL이란 용어 자체가 영어의 표준을 영미 영어로 본다는 뜻이며, 한국 영어학습자는 항상 영미 모국어를 빌려서 쓰는 아웃사이더로서의 존재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EFLer라는 인식은 곧바로 자신의 영어는 항상 모자라고 영미인에 비해 열등한 영어를 사용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David Graddol이 자신의 최근 저서 'English Next'에서 주장하듯이,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영어사용자를 모국어 사용자(native speaker), 외국어 사용자(foreign speaker)로 가르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영어가 유창한 사람(high proficiency speaker)과 유창하지 못한 영어사용자(low proficiency speaker)가 있을 뿐이다.
영어를 세계시민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용어라 한다면, 이 언어의 사용주체는 세계시민이며 이는 세계시민의 자산에 속한다. 즉 세계공용어로서의 영어(EGL, ELF)는 더 이상 영미인들에게 빌려서 쓰는 영어가 아니다.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어는 영미의 모국어인 영어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어야 한다. 우선,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어의 표준부터 달라야 한다. 이는 미국 영어도 아니고 영국 영어도 아닌 문화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어는 영미 영어를 바탕으로는 하되, 영미 문화 색채가 들어 있는 관용표현들(idioms)은 다 제외하고 세계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지향해야 한다. 세계 시민들이 영미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를 공용어로 갖는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다. 영미인들만이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관용표현과 영어 특유의 구문을 세계 시민들이 그대로 사용할 이유가 없다.
만일 현재처럼 영미 모국어를 그대로 Global English의 표준으로 삼는다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세계 공용어를 익히기 위해 자신의 삶의 중요한 시기를 영어를 익히는 데 바쳐야 한다. 이는 매우 불공평한 일이다. 그래서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어는 매우 쉬운 구문들로만 구성되어야 하며 영미인이나 잘 이해할 수 있는 영어의 관용구들(idioms)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영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관용구만 제외해도 영어는 훨씬 쉽게 배울 수 있으며, 이를 이해하지 못해 부끄럽거나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는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렇지 않고는 영어교육을 강화할수록 교육격차(educational divide), 영어격차(English divide)는 심화될 것이 자명하다. 이런 새로운 자각은 영어 사용 국가의 언어학자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점점 더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이런 패러다임을 한국의 영어교육계는 점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이제 영어의 표준을 미국 영어에 맞추는 교육을 지양하고, 배우기 쉽고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때 잘 통하며 오해의 소지가 현격히 적은 Global English를 영어 공교육의 목표로 삼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영미 영어는 영미에 가서 공부를 할 사람만 별도로 추가로 익히면 될 것이다. 언어적성이 높고 여유가 있어서 Global English 외에 영미 영어를 배울 사람은 별로도 배우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영미 영어를 표준으로 삼는 정확성 위주의 현행 평가도 재고해야 한다. Global English 시대에는 정확성(accuracy)보다는 서로 문화가 다른 국가 출신 사람들 간의 원만한 의사소통(inter-cultural communication skill), 즉 이해가능성(intelligibility)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학교의 영어시험이나 입시도 정확성보다는 이해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두어 평가할 때 한국인의 영어 의사소통 능력은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향상될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어의 영향을 받은 영어 - 이를 Korean variety of English라 부른다 - 를 태생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영어도 영미인이 사용하는 영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world Englishes의 하나란 점을 전 국민이 인식하도록 널리 알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 공용어로서의 영어의 표준모델은 교육받은 영미인이 아니고 ‘영어가 유창한 이중언어 사용자(fluent bilingual English speakers)'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세계 공용어로서의 Global English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 [영어는 비원어민과 더 자주 사용] 영어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다.
English is a means of communication among various people from various linguistic and cultural backgrounds.
• [영어의 주인은 사용자] 영어는 원어민, 비원어민 모두가 공유하는 자산이다. (영어의 사용은 더 이상 영미인의 모국어를 빌려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English is the property of its users, native and nonnative.
• [어떤 영어를 배울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처럼 똑같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은 한국어의 간섭을 받은 Global English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특히 발음이 그렇다.)
Nonnative speakers do not have to use English the same way native speakers do.
• [누구의 영어를 모델로 하나] 지향해야 할 Global English의 모델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문화가 다른 국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기술을 갖춘 ‘유창한 영어 이중언어 사용자'가 되어야 한다. 즉, 한국인이 지향해야 할 모델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먼저 습득하고, 나중에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The target model of English is not a native speaker but a fluent bilingual speaker who retains a national identity in terms of accent and who also has the special skills required to negotiate understanding with another non-native speaker.
• [정확성보다 이해가능성이 중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처럼 정확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해 가능한 점이 가장 중요하다.
Intelligibility is of primary importance, rather than native-like accuracy.
- 'English Next', David Graddol (2006)
앞으로 Global English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추는 쪽으로 진화해갈 것이라는 예측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1. 3인칭 단수 현재형 동사에 -s를 붙이지 않는다.
2. 관사(a, the)를 없애거나 사용규칙을 아주 간명하게 고친다.
3. 셀 수 없는 명사도 셀 수 있는 명사처럼 -s를 붙여 복수형을 만든다.
예) two furnitures; two baggages
4. 관계대명사 who도 which로 통일시킨다.
5. 부가의문문은 주어에 상관없이 isn't it?로 통일한다.
6. discuss about 등을 바른 용법으로 받아들인다.
7. 기존 영어표현에 필요한 경우 명사를 첨가해 의미의 명확성을 높인다.
예) 'How long time...?', 'black color'
8. 영미어의 'th'의 발음과 'dark l'발음을 발음과 듣기가 쉽도록 바꾼다.
9. 발음의 편의를 위해 자음 바로 다음에 모음을 자유롭게 첨가한다.
예) risk(1음절) → 리스크(3음절), give(1음절) → 기브(2음절), Webster(2음절) → 웨브스터(4음절)
10. 영어의 weak form을 없앤다.
예) that → 항상 [댓]으로 강하게 발음한다.
belong → [빌롱]처럼 두 음절을 똑같은 강세로 발음한다.
11. 영어의 stress-timed rhythm을 syllable-timed rhythm으로 대체한다.
예) hamburger를 [햄버거]로 세 음절에 똑같은 강세로 발음한다.
12. 영미의 표현 중 모든 언어에 공통인 것들 중심으로 남기고 영미의 관용표현은 제외한다.
예) ‘내 기억이 옳다면' → if I remember it correctly만 남기고 if my memory serves me right 등은 학습 대상에서 제외한다.
13. phrasal verb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쓰고 단일 단어로 대체 사용한다. (원어민이 아니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며 사전을 찾아서 해결하기도 어려움)
예) put out → extinguish, put off → postpone
14. 의미가 다양하고 모호한 단어 get 등은 의미가 명확한 단어로 대체 사용한다. (원어민이 아니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며 사전을 찾아서 해결하기도 어려움)
예) get 구하다, 입수하다 → obtain
- David Graddol, Jennifer Jenkins, 이찬승
Global English 탄생을 위한 이런 세계적 노력을 David Graddol은 ‘The World English Project'라고 부른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아시아에 달렸다고 그는 예상한다. 아시아가 미래에 세계 경제와 힘의 중심이 되고,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 측면에서도 단연 1위 지역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로 자리 잡아가는 21세기에도 영미 영어를 표준으로 삼는 영어교육 정책은 수많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영어 낙오세대를 양산하게 될 것이다. 이제 영어는 무학년 선택과목으로 가져가고 평가는 pass/fail로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학습자의 영어실력이 학년과 무관한 정도가 심화되었고, 개인별 성취목표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 영어를 철저히 의사소통능력 향상에만 목표를 둔 Global English 코스와 영미 영어를 표준으로 하는 코스로 이원화하는 것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젠 영미 영어 맹신에서 벗어나 세계의 다양한 영어, 즉 world Englishes를 함께 배우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현재 미국 영어에 경도된 한국 영어교과서들이 최소한 영국 영어, 호주 영어, 인도 영어를 각각 한 과씩만이라도 반영한다면, 동료 학생의 발음이 미국식과 다르다고 왕따시키고 열등한 발음으로 취급하는 일부 초등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너무 다양한 영어가 지구 상에 공존하면 나중에는 의사소통이 안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 이 분야 세계의 많은 연구나 주장들을 보면 교과서나 신문, 방송 등 공공성이 있는 모든 기관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영미 영어와 가까운 영어를 표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것이 구심력으로 작용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과 얘기할 때는 서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도민만의 토착표현은 사용을 자제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영어의 표준이 변하고 있는 상황과 Global English 패러다임을 영어교육자들은 정확히 파악하여 영어로 인한 불평등의 심화를 줄이고 누구나 쉽게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시대를 앞당겨야 한다. 이는 한국에서 영어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책무가 아닐까.
출처:영어 등대 이찬승 http://www.leechanseung.pe.kr